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길가에는 하얀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발롱발롱 피어난 이팝나무 꽃이 하늘거리는 5월 하순. 왕실 사찰로 융성했었으나 지금은 절터만 남은 양주 회암사지를 둘러보려고 집을 나섰다. 여행을 하다 보면 첫인상 하나만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
양주 회암사지가 그랬다.
📌 양주 회암사지 핵심 탐방 정보 요약
| 구분 | 상세 내용 |
| 위치 |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167 (회암동) |
| 추천 탐방 동선 | 회암사지박물관➔회암사지절터(석축·중앙대로·정료대)➔회암사지사리탑 ➔전망대 쉼터➔(산길이동)➔회암사 3대 조사 부도탑(지공·나옹·무학) |
| 시간 | 박물관 약 1시회암사지 절터 회암사 부도탑 탐방 약 2시간 |
| 주요 포인트 | 9단 계단식 왕궁형 대가람 터, 태조 이성계 상왕 머묾 터(행궁), 회암사지 사리탑(보물), 석조 정료대, 지공·나옹·무학대사 부도 및 비석(보물) |
| 입장료 | 절터 입장료 무료 / 박물관 유료 / 넓은 무료 주차장 완비 |
1.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회암사지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당시 사찰의 거대한 규모를 재현한 모형을 보며 그 크기에 놀랐고, 건물에 왕실 기와인 청기와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박물관이 상당히 컸다. 2층까지 둘러보는데 1시간 넘게 걸렸다.
2. 천년의 세월이 녹아 있는 절터
박물관을 나와서 뒤편에 있는 회암사지로 갔다.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터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이건 절터가 아니라 왕궁터네."
그만큼 회암사지는 막힌 데 없이 트여 있었고 드넓었다. 조선 왕실의 사찰이었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산 아래 넓게 펼쳐진 절터에는 천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건물은 사라졌어도 주춧돌과 석축은 남아 돌 하나하나에 역사를 새기며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옛 명성은 간 곳 없이 황량한 벌판에 석축만 남아있는 회암사 터로 갔다. 일주문이 있었다는 자리에 서서 보니 왼편으로는 당간이 보이고 저 멀리 산자락 아래 회암사지 사리탑이 아스라이 보였다.
먼먼 이야기가 서려있을 회암사 터에 발길이 닿자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돌과 풀, 그리고 넓은 터뿐이었지만, 오래전 이곳에 울려 퍼졌을 염불 소리와 은은한 풍경소리가 귓전에 스치는 듯했다.
마치 궁궐처럼 계단식으로 축조된 석축들을 보면서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차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의 인연으로 회암사를 지극히 아꼈는데, 왕위를 물려준 뒤 이곳에 머물며 수도 생활을 하고 정사를 돌보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면 사실상 궁궐의 기능을 겸한 왕실 행궁의 역할까지 했던 곳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회암사지는 막힌 데 없이 트여 있었고 드넓었다. 조선 왕실의 사찰이었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산 아래 넓게 펼쳐진 절터에는 천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건물은 사라졌어도 주춧돌과 석축은 남아 돌 하나하나에 역사를 새기며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옛 명성은 간 곳 없이 황량한 벌판에 석축만 남아있는 회암사 터로 갔다. 일주문이 있었다는 자리에 서서 보니 왼편으로는 당간이 보이고 저 멀리 산자락 아래 회암사지 사리탑이 아스라이 보였다.
먼먼 이야기가 서려있을 회암사 터에 발길이 닿자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돌과 풀, 그리고 넓은 터뿐이었지만, 오래전 이곳에 울려 퍼졌을 염불 소리와 은은한 풍경소리가 귓전에 스치는 듯했다.
마치 궁궐처럼 계단식으로 축조된 석축들을 보면서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차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의 인연으로 회암사를 지극히 아꼈는데, 왕위를 물려준 뒤 이곳에 머물며 수도 생활을 하고 정사를 돌보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면 사실상 궁궐의 기능을 겸한 왕실 행궁의 역할까지 했던 곳이었던 것이다.
3. 시간을 품은 회암사지 사리탑과 정료대
회암사지는 비스듬한 산기슭에 절 마당이 층층이 아홉 단이나 되는 큰 규모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오른쪽 길을 따라 가장 높은 단까지 올라갔다. 거기에는 회암사지 사리탑이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조각이나 문양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정성이 보였고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탑은 돌로 만든 건축물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하나의 생명인 듯했다.
5월 하순의 햇살이 아주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곧게 내리쬐는 햇볕을 머리에 이고 사리탑 뒤편에 난 산길을 따라 회암사 터 왼쪽 언덕에 있는 전망대 쉼터로 갔다. 잠시 더위를 식히면서 회암사지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직접 거닐었을 때도 크기가 엄청나다고 생각했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 전체를 조망하니 그 규모는 생각 이상이었다. 쉼터에서 회암사 터로 내려갔다. 중앙대로를 사뿐사뿐 걸어가는데 색다른 조형물이 보였다.
돌로 된 정료대라고 하는데 정료대는 원래 사찰, 서원 등에서 야간 행사가 있을 때 관솔이나 송진 등을 태워 경내를 밝히던 것으로 노주석 또는 불우리라고도 했단다. 주로 전각 앞에 설치한 듯한데 여기저기 여러 곳에 남아있었다.
4. 위대한 스승과 제자 (지공대사·나옹선사·무학대사)
회암사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님들이 있다. 고려 말의 유명한 선승 나옹대사와 그의 제자 무학대사, 그리고 인도에서 왔다고 하는 지공대사다. 세 분 스님의 부도와 탑을 보려면 산 위 골짜기에 있는 지금의 회암사까지 걸어 올라가야 한단다.
이미 사천왕문 자리까지 내려가 버렸는데 언제 거기까지 다시 올라가나 갈등이 일었다. 하지만 그냥 집으로 간다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싶었다.
"언제 또 올지 모르고 다시 못 올 수도 있는데 힘들지만 이참에 세 분 스님을 마저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해서 방향을 틀어 산길을 올라갔다.
세 분 스님의 부도와 탑은 오늘날 새로 지은 회암사의 오른쪽 산등성이에 있었다. 맨 위쪽에는 나옹선사 부도가 있고 중앙에는 지공대사 부도가 있으며 바로 아래쪽에는 무학대사 부도가 있었다.
세 분의 부도와 비석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마음이 저절로 숙연해졌다. 책 속에서 만났던 세 분의 스님들이 이곳에서는 살아있는 역사로 다가왔다. 수많은 수행과 가르침, 그리고 천년 가까운 세월이 그 자리에 안온히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또한 세 분의 사리가 모셔진 부도가 한 곳에 나란히 모셔져 있어 시공간을 초월한 이들의 사제지간 정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듯했다.
📜 한국 불교의 명맥을 잇고 새로운 시대를 연 세 스님
‧나옹선사: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로,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승 중 한 명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의 작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원나라 연경(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머물고 있던 지공대사를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스승인 지공으로부터 "법을 동방(고려)으로 전하라"는 인가를 받고 귀국하여 회암사를 거대한 대가람으로 중창했다.
‧무학대사: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승려로, 나옹선사의 제자다. 스승인 나옹을 통해 지공대사의 가르침까지 이어받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로,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낡은 집에서 나온 꿈'을 꾸었는데 이를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징조라고 해석해 준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새로운 수도를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건국 후에는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5. 옛 영화는 간 데 없고
천년의 시간.
왕실의 숨결.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이곳을 감싸고 있는 고요함.
그 모든 것이 이 절터에 남아 있었다.
떠나는 길에 다시 한번 넓은 회암사지를 돌아보았다. 옛 영화는 간 데 없고 황무지처럼 흙 묻은 돌무더기들만 남아있다. 그러나 천년의 시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시간은 흘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해가 서쪽 하늘에 반쯤 기울었을 때 우리는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며 돌무더기만 남아있는 회암사지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