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부상을 딛고 오래전부터 가슴속에 품어왔던 전북 순창의 영산 회문산(해발 837m)으로 향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밤새 스멀스멀 내려온 안개가 여기저기 솜뭉치처럼 가라앉아 사위를 부옇게 덮어버렸다. 휴게소로 들어갔다. 꼭 마셔야만 정신이 들 것 같은 커피를 사 들고 등나무 아래 앉았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다 마실 때까지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바람 끝이 서늘하여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새벽 바람이 긴 꼬랑지 끝에 달고 다니던 가을을 슬그머니 떨구어놓은 모양이다
동학혁명과 항일의병,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 유격대의 아픈 역사가 서린 현장이자 호남 5대 명당으로 꼽히는 회문산의 능선길, 독특한 바위와 고목, 그리고 하산길의 역사관 탐방까지 원점회귀 산행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다.
1. 순창 회문산 산행 핵심 정보 요약
| 구분 | 주요 내용 |
| 위치 | 회문산(해발837m)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 임실군 덕치면 경계 |
| 등산 코스 | 회문산자연휴양림 매표소 주차장 ➔ 들머리 ➔ 돌곶봉 ➔ 시루봉 ➔ 여근목·음문바위 ➔ 작은지붕(헬기장) ➔ 큰지붕(회문봉 정상, 837m) ➔ 서어나무 삼거리 ➔ 회문산 역사관 ➔ 출렁다리·구룡폭포 ➔ 매표소 원점회귀 |
| 시간 | 전체 소요 시간 약 5시간 (식사, 역사관 관람 및 휴식 포함) / 약 8km |
| 산행 난이도 및 특징 | 난이도 중: 초반 돌곶봉까지 계속 오르막이 이어지나 전체적으로 길이 정비되어 있어 다리 부상 회복 후 오르기에도 무리가 없는 편 지리적 특징: 섬진강이 감싸 안은 천혜의 요새 지형, 명당 무덤터가 많음 |
| 주요 볼거리 및 문화재 | 기암 및 고목: 여근목, 음문바위(천근월굴), 수백 년 된 서어나무 역사적 현장: 회문산 역사관 (동학, 의병, 빨치산 남부군 전북도당) 경치 휴양: 구룡폭포 출렁다리, 정상에서 조망, 지리산·모악산·무등산 능선 |
2. 천혜의 요새, 회문산자연휴양림 들머리 진입
높이 837m의 회문산은 겹겹이 둘러싸인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를 갖추고 있으며, 옥정호와 구림천에서 흘러든 섬진강이 산자락을 감싸 흐르는 천혜의 요새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구한말 동학혁명과 항일 의병의 거점이 되었고, 분단기에는 남부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자리 잡았던 역사의 비극이 서린 곳이다.
회문산자연휴양림 입구 매표소 근처 다리를 지나 왼편 작은 산길 들머리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했다. 돌곶봉을 향해 오르는 경사길을 나무와 바위를 차분히 짚어가며 차근차근 올라섰다. 맑은 물방울을 머금은 나뭇잎과 풋풋한 흙냄새가 가을을 촉촉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호남 5대 명당으로 꼽히는 명산답게 길가에는 성성한 무덤들과 돌무더기들이 눈에 띄었다. 한때 3천여 개의 묘지가 조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돌곶봉과 거대한 돌문이 반기는 시루봉을 지나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3. 자연의 신비가 느껴지는 여근목과 음문바위
정상을 앞두고 풍성하게 가지를 늘어뜨린 여근목을 만났다. 숱한 화마 속에서도 생명을 보존한 독특한 수형 앞에 지나는 산객들이 연신 탄성을 내뱉으며 사진을 남기곤 했다.이어 조금 더 오르자 음기가 강하다고 전해지는 음문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암벽에는 음문굴과 함께 한자로 '천근월굴(天根月窟)'이라는 명문이 각자되어 있다. 양기가 강한 아버지 산의 성격을 띤 회문산에서 이 음문바위가 음양의 조화를 맞춰준다는 설화가 흥미로웠다.
주변에는 한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사방으로 솟구쳐 곧게 뻗은 고목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산세의 기이함을 더해주었다.
4. 회문산 정상 큰지붕에서 바란 남도의 산하
가파른 비탈길을 다 올라 마침내 정상인 큰지붕(회문봉, 837m)에 다다랐다. 별도의 정상석 없이 이정표가 정상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동쪽으로 천마봉과 깃대봉, 서쪽으로 장군봉이 감싸 안고 있었으며, 멀리 강천산, 추월산, 무등산부터 모악산, 지리산 능선까지 남도의 장쾌한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 좋은 반석 위에 앉아 준비해 온 김밥을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바람을 맞았다. 세월 속에 스러져간 이 산의 숱한 사연들을 떠올리며 길게 휴식을 취했다. 엉덩이가 저릴 만큼 오래 앉아 있었다. 산행에 소요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고 계절이 바뀌어 가는 자연의 넉넉함도 있으려니와, 지나간 세월 속에 이 산중 구석구석에 아로새겨진 조상들의 얼룩진 사연들을 생각하니 쉬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것이리라.
5. 서어나무와 회문산 역사관, 그리고 구룡폭포
하산은 역사적 자취를 둘러보기 위해 회문산 역사관 방향으로 잡았다. 정상에서 내려와 서어나무 삼거리에 들어서자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낸 늙은 서어나무가 나타났다. 초토화 작전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나무는 기괴하게 비틀리고 구멍 뚫린 생채기를 끌어안은 채 아픈 역사의 증인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서어나무 나이테에 새겨진 이 산의 아픈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짝을 만나지 못한 매미들이 피를 토할 듯이 목놓아 울었다. 가을 풀벌레들도 여기저기서 계절을 재촉했다. 가고 오는 세월 따라 자연의 순환 또한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인간사의 일어남도 스러짐도 부질없음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어 방문한 회문산 역사관에서는 동학민, 의병, 그리고 빨치산에 이르기까지 이념과 전쟁의 광풍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역사를 보았다. 전쟁의 상처를 되새기며 평화와 화해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장소였다.
6. 여름이 떠나가는 길목에서
산기슭을 따라 내려오다 계곡을 가로지른 출렁다리로 갔다. 계곡 윗자락에 있다는 이름난 구룡폭포를 보고자 무성한 잡풀 길을 지나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층층으로 기운 바위 벼랑 위를 서너 계단 꺾어지며 흘러내리는 물길이 제법 운치 있어 보였다. 여름의 끝자락도 마저 폭포수에 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어느새 발길은 산 날머리에 닿아 있었다. 뒤돌아보는 회문산에는 기세등등하던 초록들도 야위어가고 모락모락 가을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산길 이곳저곳마다, 산골짝 여기저기마다 세월 속에 묻힌 아버지와 삼촌들의 애달픈 청춘도 서늘한 바람결 따라 조금씩 조금씩 붉게 물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