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6월, 남편과 함께 떠났던 제주 여행의 기록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1. 가슴 한켠에 똬리를 튼 제주, 그리고 갑작스러운 결심
늘 제주에 가고 싶었다. 마음 한켠에 똬리를 틀고 앉은 제주.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지만, 언제든 가기만 하면 오랫동안 있다 와야지 마음먹었다. 한적하고 아담한 마을에서 하는 일 없이 그저 바다를 질리도록 보고 싶었다.
나는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일을, 남편은 진즉부터 철쭉꽃 피는 오월이 되면 한라산에 가야겠다 생각했단다. 오월은 되었는데 집안 행사가 연이어졌다. 날들이 포개져서 가는지 꽃은 이미 시들었고, 때는 눈치도 없이 햇빛이 날을 세우기 시작하는 유월로 넘어가려 한다.
한라산 오르기가 괜찮을지 여러 날 생각한 남편은 유월 초는 괜찮을 것 같다며 가잔다, 한라산에.
2. 여행은 심장이 떨릴 때 떠나는 것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은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의 거리가 9.6km로 가는 데만 다섯 시간가량 걸린다. 가고 싶다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다리에 힘이 남아있는 지금,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젊은 지금, 앞뒤 재지 말고 갔다 오자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인터넷 검색을 하여 항공권과 숙소, 렌터카를 예약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는데 예약하면서는 꿈을 꾸는 듯했다.
언젠가 한 여행사 입간판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여행은 심장이 떨릴 때 떠나는 것이지, 다리가 떨릴 때 떠나는 것이 아니다."간 듯 모르게 세월이 가면 다리도 따라 떨릴 날이 있을 터. 그날이 언제 우리에게 찾아들지 알 수 없으니 기회가 닿는다면 주저 없이 나설 일이고, 기회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나설 일이다. 가자, 한라산으로.
여행은 4박 5일 일정으로 잡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오르고, 하루는 우도에서 보내고, 또 하루는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에 갔다 오는 걸로 정했다. 가방을 꾸리고 빠진 것이 없나 점검하는 사이 제주에 가는 날이 뽀짝 다가왔다.
3. 십 년 하고도 수년 만에 다시 밟은 제주 땅
낮 1시 35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열두 시경 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선이라 수속이 복잡하지 않을 텐데도 그냥 서둘러 집을 나섰다. 공항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는 시간조차 여행의 일부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제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데 제주 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탑승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활주로에서 이륙하기까지의 시간 때문에 길게 느껴졌을 뿐, 실제로 하늘을 날아간 시간은 30분도 채 안 되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주 땅을, 우리는 십 년 하고도 수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다시 밟을 수 있었다.
4. 용두암의 씁쓸함과 제주목 관아의 오롯한 휴식
렌터카를 인수하기로 한 시간까지 물품보관소에 가방을 맡겨 놓고 용머리 해안과 제주목 관아를 둘러보기로 했다.
‘에게, 바위가 원래 이렇게 작았나?’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금방이라도 용솟음칠 것 같았던 그 옛날의 웅장함은 어디로 가고, 크고 높은 건물에 가려 왜소해진 용바위가 씁쓸한 기분을 들게 했다.
시간이 넉넉하여 해안을 거닐다 철썩이는 파도에 눈을 묶어둔 채 한참을 서있었다. 그 사이에 수도 없이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통화가 어려울 정도로 소음이 굉장했으나 그것조차도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이 되었다.
걸어서 20분이면 된다기에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제주목 관아로 갔다. 보물로 지정된 관덕정은 수리 중이어서 볼 수 없었지만, 그 앞에 왕방울만 한 눈을 부릅뜨고 관아를 지키고 서 있는 돌하르방을 만났다.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 지방 통치의 중심지였으며,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란다. 목사가 집무했다는 연희각 마루에 앉았다. 썰물 빠지듯 몇 무리의 관광객이 빠져나가자 관아는 오롯이 우리만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바람은 구름을 밀어 태양을 가리고, 우리 몸을 휘감아 더위를 식혀주더니 피로와 노곤함마저 탈탈 털어내 주었다.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게 한참을 그렇게 앉아 시간을 낚았다.
5. 소소한 저녁 식사와 첫날을 보내는 아쉬움
공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렌터카 사무실로 가서 차를 인수하고, 공항에서 가방을 찾아 한라산이 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숙소로 갔다. 체크인을 마치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가로 20여 분 차를 타고 나왔다.
간판이 식당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갈빗집이 눈에 띄었다. 차도 여러 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이 많은 집은 맛도 괜찮겠지' 넘겨짚으며, 술 생각이 간절한 남편을 위해 갈비를 먹기로 했다. 양념 갈비 2인분을 주문했는데 3인분도 더 되어 보이는 푸짐한 양이 나왔다.
"무지하게 많은 양을 남김없이 다 먹었는데도 그다지 부대끼지 않는 것은 왜일까?"
"하루 내내 먹은 것 없이 에너지를 썼으니, 고갈되어 버린 창고에 채워 넣을 것이 많아서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는 것처럼 재잘거리며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가 그렇게 가고 있었다. 이제 첫날인데 지나버린 시간이 아까워서 붙잡아 두고 싶었다. 아니, 고무줄 늘이듯 하루를 아주 길게 늘여놓고 싶었다.
[제주 여행]📋 [2편] 둘째 날: 비바람을 뚫고, 아슬아슬했던 우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