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심코 사용해 온 '산맥'이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땅속 지질구조선을 기준으로 그려 만든 지형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제는 산에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 지리서에도 없는 산맥 개념을 도입해 산과 강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켰다. 해방 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러한 표현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현실은 씁쓸함을 남긴다.
우리 선조들의 전통 지리서인 <산경표>에 따르면 산과 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두 능선 사이에 하나의 계곡이 있고 두 계곡 사이에 하나의 능선이 위치하여,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산줄기는 '산맥'이 아닌 '정맥'으로 부르는 것이 올바르다. 정맥은 강을 구획하는 분수령이자 울타리로, 우리나라에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1정간 13정맥, 총 15개의 산줄기가 10대 강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올바른 우리의 산줄기 이름을 되찾아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산행지는 서해와 인접하고 호남평야를 사이에 둔 변산이다. 호남정맥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산군을 이루는 변산은 예로부터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으로 불린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다. 산 안쪽을 내변산, 바다를 끼고도는 외곽을 외변산이라 칭한다.
📌 변산반도 내변산 산행 코스 & 핵심 정보 요약
| 구분 | 주요 내용 |
| 위치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국립공원 (내변산) |
| 산행 코스 | 내소사 ➔ 관음봉 삼거리 ➔ 관음봉(424m) ➔ 재백이 고개 ➔ 직소폭포 ➔ 실상사 ➔ 내변산탐방지원센터 |
| 시간 | 약 7시간 소요 / 관음봉 오르는 길은 가파른 암봉 구간이나 난간이 설치 |
| 주요 포인트 | 내소사: 전나무 숲길, 대웅보전(백의관음보살좌상·이광사 현판)꽃창살 관음봉과 곰소 바다: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곰소 앞바다 조망 직소폭포와 실상사: 내변산의 으뜸 경관으로 꼽히는 절경과 고즈넉한 사찰 |
| 교통 및 산행 팁 | 종주 산행 시 내변산 주차장에서 내소사로 직행하는 버스가 없으므로 부안 시내버스(상서/보안 환승) 또는 택시 이용 고려 내소사 전나무 숲길과 대웅전 목조 장식을 여유 있게 관람하는 것을 추천 |
세월의 멋을 품은 능가산 내소사와 대웅보전의 미학
산행은 능가산 내소사에서 출발했다. 학교 졸업하고 내소사에서 열린 7일 정진법회에 참석했던 기억이 아슴아슴 피어올랐다. 며칠 동안 머물며 정성껏 절을 올렸던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그 뒤편의 백의관음보살좌상은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신성하다. 보살상의 눈동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에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대웅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 서예가 원교 이광사의 필체다. 문에 새겨진 꽃무늬 창살은 해바라기, 연꽃, 국화 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어 한국 전통 장식 문양의 정수를 보여준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며 채색은 바래고 앙상한 나뭇결만 남았으나 되레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빛이 났다.
포근한 날씨 속에 산행을 시작했다. 관음봉까지 이어지는 오르막에 들어서자 금세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산을 지치지 않고 즐기려면 시작은 느긋하게 하고, 심호흡을 자주 하며, 끝까지 일정한 속도와 인내심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조급해하거나 욕심부리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그 과정 자체로 빛나는 삶이 될 것이다.
관음봉 암봉과 곰소 앞바다가 전하는 삶의 깨달음
관음봉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봉이다. 중간중간 설치된 난간에 의지해 암벽을 타듯 오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만큼 좁은 오솔길이 정겹다. 땅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들이 길 위에 뿌리를 기꺼이 디딤돌로 내주었다. 숨을 가쁘게 쉬며 정상에 올라서자 청량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산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잠시 몸을 움츠렸다.
관음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곰소 앞바다는 한적하고 고요했다. 과거 배가 드나들고 시장이 형성되어 활기가 넘치던 항구였으나, 토사가 쌓여 물길이 좁아지면서 지금은 물새들의 편안한 쉼터가 되었다. 영원할 것 같은 부와 명예도 세월이 지나면 아득한 기억으로 사라진다. 가진 것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남으면 나누며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하산길을 잡자 건너편 산에 비구름이 걸리더니 가랑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회색빛 구름이 관음봉과 숲을 감싸 안으면서 낙엽 소리마저 고요하게 잠재웠다. 드센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고 잠시 비가 그치자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를 지나 재백이 고개에 다다랐다. 단풍으로 물든 산야와 계곡물에 비친 하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직소폭포의 웅장함과 부안 들판을 둘러본 하산길
오솔길을 따라 걸어 도착한 직소폭포는 가뭄 탓에 물줄기가 말라 수줍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폭포수가 콸콸 쏟아지는 장관은 보지 못했지만, 폭포 아래 깊은 소와 못이 만들어낸 풍경만으로도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실상사로 향하는 길가에는 잎을 떨군 나뭇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남겨진 알밤만 한 감들이 달랑달랑 달려 있었다. 내변산 주차장 근처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노란 단풍잎을 발견하는 행운도 누렸다.
오후 2시쯤 주차장에 도착해 차량이 있는 내소사로 돌아가려 했으나 직행 버스가 없었다. 택시 요금이 비싸 일단 부안행 버스를 타고 상서면 정류장에서 내려 환승하기로 했다. 30분 남짓 기다려 내소사 방향 버스를 탔는데, 시골 마을을 구비구비 돌아가는 바람에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벼를 베어낸 황량한 들판과 스산한 나뭇가지, 빗물에 촉촉이 젖은 부안의 시골 풍경을 편안하게 유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둘러선 산들을 하나씩 뒤로 보내며 마침내 내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온종일 산의 품에 안겨 가슴 가득 자연을 담아온, 더없이 개운하고 뿌듯한 하루였다.
세월은 흘렀어도 변산의 호젓한 산길과 관음봉에서 바라본 고요한 바다, 그리고 그날의 깨달음은 여전히 내 삶의 든든한 이정표로 남아있다.